알아야 사랑하게 된다는데 몰라도 미워 못할 사람이 있다.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데 나에 대해 모르는 것 없는 사람이 있다. 유소영 감독에게는 엄마가 그런 사람이다. 한때는 부끄러웠지만 어느덧 나의 자랑이 되어버린, 똑똑하고 재미있고 고집스럽고 귀여운 공순 씨.
유소영 감독은 영화를 찍으면서 엄마 ‘공순’을 롤모델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많은 ‘공순’들에게, 또 더 많은 모녀들에게 이 영화가 가닿기를 바란다.

Q. 이전 작품 <꽝>도 노동하는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다. <공순이>를 보고 나니, 중년 여성과 노동에 관한 영화를 찍은 데에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기획 당시엔 전혀 없었다. <꽝>의 주인공인 이정애 선생님을 보면서 엄마랑 조금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외모도 비슷하고 눈빛도 비슷했다.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무슨 일을 할까? 맨날 밖에 나가는 걸 보면 무슨 일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일이 뭘까?’ 궁금해졌다.
Q. 영화 속 내레이션으로도 언급하지만, 그전에는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아예 몰랐다고 하면 사람들이 안 믿는다.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된 건데, 엄마가 의도적으로 가계 문제를 숨겼던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는지도 말을 안 하고, 우리집이 월세라는 것도 말 안 하고, 반면 아빠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식으로 늘 말했었다. ‘네가 할 일은 공부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주입당한 사고방식이 ‘부모 일은 부모 일, 자식 일은 자식 일. 자식이 되어서 부모 일에 간섭하지 마라’였다. 하도 그 말을 많이 듣고 살아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다른 가정은 다르게 사는구나, 난 너무 우리 가족의 방식에만 익숙했던 거였구나’ 하는 걸 찍으면서 알게 됐다. 영화를 본 분들이 늘 ‘어떻게 엄마 하는 일을 딸이 모를 수 있어?’ 하는데, 나는 정말 몰랐다.
Q. 그 정도로 말씀을 안 하셨으면, 처음 어머니에게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거부하거나 망설이는 반응이 나왔을 법도 한데.
<꽝>이 한창 영화제 상영을 할 때 엄마를 많이 데리고 다녔다. 엄마랑 이정애 선생님도 친해졌다. 그렇게 3명이서 다니다 보니까 엄마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멋있다’하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 같다.
Q. 오랜 기간 준비한 만큼 촬영 소스가 많다. 인터뷰, 이동하는 모습, 일하는 모습, 주변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 등등. 그런데 대부분의 장면에서 유소영 감독 본인은 어깨만 걸린 채거나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꽝> 같은 영화를 또 만들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촬영자는 그림자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촬영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 피칭을 하면서 다른 분들 의견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이렇게 딸이 그림자로만 존재하면 단편에 그치는 영화다. 욕심이 있고 장편으로 만들고 싶으면 딸이 들어가야 된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때부터 뒤에서 말도 해보고, 슬쩍 등장하기도 했다. 집에 있으면 무조건 녹화를 켜둔 뒤 일상생활을 하며 언제 어디서건 일단 계속 찍었다.
Q. ‘딸이 등장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에 설득이 된 거다.
그렇다. 단편영화는 개봉 확률이 현저히 낮은데, 엄마는 항상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만들어라’고 했거든. 지금 결과물은 <국제시장>이랑 완전 딴판이지만, ‘엄마가 느끼기에 비슷하게라도 하려면 장편을 찍어야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장편으로 만들려면 내가 영화 안에 들어가야 하겠구나’ 결단을 했다. 그 이후론 사리지 않고 찍었다.
그럼에도 내가 뒷모습이나 신체 일부로만 등장하는 건, 처음에 <꽝>을 염두에 두고 촬영할 때 다 보이스오버로 처리할 것을 계획하고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잘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Q. 관객으로서 그 또한 의도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집 촬영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앵글이 모퉁이에 앙각으로 카메라를 놓고 공순 님에게 포커스를 맞춘 화면이다. 그게 꼭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족을 찍는 일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최대한 멀찍이서 찍으려고 한 것 같지만 실은 이미 집이라는 사적 바운더리 안에 들어와 카메라를 놓았음을 보여주는, 모녀 관계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감독님은 화면 구석에 있지만, 구석이라고 해봐야 몇 걸음 걸으면 금세 공순 님에게 닿을 정도의 거리감이다.
솔직히 당시엔 마이크 방향이 나와 엄마를 향해 있느냐만 중요했다. 나는 화면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목소리만 따서 예쁘게 편집하려고 했다. 촬영을 이어가던 중 ‘이 영화는 진심이 안 통하면, 허세 같아 보이면 외면받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을 예쁘게 꾸며낼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상하다고 폐기했던 장면도 마음이 담겨 있다면 다 넣자고 결정했다. 휴지통에 있는 거 다 꺼내고, 내가 예쁘지 않다고 버렸던 것들 다 다시 건져서 만든 게 지금의 영화다. 정직하게 말하면 의도하고 잡은 앵글이 아니지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Q.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 결심한 씬 이후로는 공순 님과 감독님이 아이 레벨에서 동등하게 위치하고, 측면이든 후면이든 비슷한 비중으로 담기는 장면들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이게 감독님의 변화를 드러내는 걸 수도 있겠다고 추측했다.
맞는 것 같다. 내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많다. 일단 엄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됐다. 도배 일을 한다는 것도 몰랐다. 엄마가 해운대 센텀에 청소하러 나간다고 말하곤 했는데, 별로 깊이 알고 싶지 않아서 ‘아, 우리 엄마는 청소 일 하나보다’ 하고 말았었다. <공순이>를 찍으러 가서 보니까 엄마가 일하는 모습이 진짜 멋있었다. 일당도 진짜 많이 받고. 처음부터 잘했을 것처럼 능숙하고 노련했다. 근데 엄마 동료 아저씨들이 그랬다. “너는 엄마가 능력자 됐을 때 보러 와서 잘하는 것만 봐가지고 모르는 거다. 너희 엄마가 처음에 이 일 시작할 때 맨날 욕 들어먹고 차 안에서 혼자 우는 걸 봤어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책임감도 부족하고 힘든 일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잘할까. 아니,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잘하게 되었을까. 그 생각을 하며 계속 엄마를 찍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이고, 어디서든 말발로 일감을 따낸다. 우리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카페에 와도 벽지며 시멘트를 하나하나 다 지적하면서 일을 받아낼 사람이다. ‘내가 배워야할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구나, 엄마를 롤모델로 삼아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비단 일이 아니어도, 평상시 대화 주제도 많아졌다.
Q. 작품 안에서도 어머니가 인생 선배로서 하는 조언이 있다. ‘사람이 너무 보상 없는 노동만 하면 지친다’처럼. 이전에는 그런 말씀도 삼가셨을까?
작품 하면서 처음 들었다.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전에는 그냥 엄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상으로 남겨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보면서 ‘엄마가 나를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구나,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었구나’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엄마는 항상 같았을지 모른다. 그저 내가 엄마 말을 처음으로 귀기울여 들은 걸지도. 근본적으론 내가 엄마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Q. 영화를 보며, 공순 님에게 감독님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란 걸 느꼈다. ‘우리 딸이 나보다 예쁘고, 다리도 길고, 손도 예쁘고, 대단한 영화감독이다’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도 카메라로 어머니를 담으면서 발견할 수 있던 마음이 아니었을지 생각했다.
엄마의 마음이 찡하면서도, 엄마의 유일한 자랑이 딸이 되는 건 또 너무 싫다. 그냥 김공순 본인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내가 더 예쁘다고 한다. GV에서도 매번 그러는데 그게 내 눈물 버튼이라서, 요즘 눈물바람으로 GV를 하고 그런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GV를 하면 좀 슬프기도 하다. 엄마들은 다 이런가 싶고, 아님 우리 엄마가 유독 나 아빠 없이 자랐으니 감싸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나 싶고.
Q. 이제 그러지 말라고 말씀은 드려 봤나.
교육이 절대 안 된다. 몇 번 말했는데, 엄마의 행동이나 말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Q. 영화엔 촬영 소스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수집한 푸티지도 많다. 신발 공장 여성 노동자 관련 기사 스크랩이나 기념비, 어머니 생활기록부와 일기장 등등.
열심히 모았다. 종류별로 폴더가 쫙 있다. 엄마 일기는 ‘다큐 찍어야 되니까 일기를 좀 써줘’ 요청한 건데, 정말 성실하게 잘썼다. 초반엔 엄마의 일기로 진행되는 9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 편집본도 있다. 지금 버전으로 완성하면서 서랍 안에 잠든 일기들이 가끔 아쉽다.
Q. 일기 속 소개하고 싶은 구절이 있을까?
진짜 시적인 게 많다. 엄마 말로는 편지 세대라서 엄마 친구들도 다 글을 잘쓴다고 한다. 구절을 떠올려 보면… 이를테면 엄마는, ‘행복한 여름밤 보내세요’가 아니라 ‘행복한 꽃밤 보내세요’라고 쓴다. 꽃밤이라는 단어는 잘 안 쓰지 않나? 감탄하면서 읽었다.
Q. 편집되기는 했지만 작품 안에 여전히 잠깐씩 일기장이 등장한다. 어머니, 그러니까 유소영 감독의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평서문이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아라리오’하고 끝난다. 공순 님의 감수성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그렇게 안 쓰지 않나? 엄마 글에선 갑자기 그런 요소가 튀어나온다.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 ‘뭐든지 재미가 있어야 한다’다. 사람들은 조금 어색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거나 갑자기 바보 같이 굴면 웃는다면서, 늘 타인을 웃겨주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게 몸에 배어 있다. 나는 그게 엄마의 가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가졌던 무기 같기도 하고. 삶이 곧 투쟁이니까 남을 웃겨야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찾아주지 않았을까 싶다.
Q. 영화 속에도 어머니의 매력 포인트가 담긴 장면이 많다. 거울 앞에서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하시는 장면도 관객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
그러게 말이다! 난 오글거리는 것 같아서 안 넣고 싶었는데 편집감독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이 영화는 편집감독님에 의해서 마술처럼 다시 살아났다.
Q. 편집 과정이 어땠기에?
앞서 말한 일기 버전을 비롯 몇몇 버전 중에서 지금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후 내가 모은 푸티지를 전부 다 보여드리고, 도무지 순서를 못 정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나에겐 김공순이라는 사람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기에 앞서 엄마기 때문에, 정말 처음 본 낯선 아줌마로 바라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편집을 이연정 감독님이 해주셨다. 좋은 작품 워낙 많이 편집하시지 않았나. 시간 안 된다는 거 꾸역꾸역 졸라서, 감독님 편집실 앞에 숙소를 잡아놓고 한 달 동안 편집에 매달렸다. 감동적이었던 게, 감독님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면서 편집해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니 정말 경이로웠다. 덕분에 믿고 맡겼다.
Q. 그럼 감독님의 최애 픽과 편집감독님의 최애 픽 장면은 각각 무엇이었나?
내 최애 픽은 들어가지 않았다. 빼버렸다. 엄마와 할머니 무덤에 갔다가 정리하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엄마 부르고 싶다. 엄마!”하고 외치는 거다. 그러고선 “엄마를 생전 처음 불러본다. 나는 엄마더러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엄마라고 부르니까 너무 좋다”라고 했다. 나는 그 장면에 감동받아서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마지막 장면 같은 느낌? 하하. 그런데 편집감독님이 “공순 님이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한번 보는 게 너무 연기 같다. 이거는 빼야 된다”라고 하셨다. 한순간이라도 진심이 안 느껴지면 안되는 영화라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빼버렸다.
Q. 그럼 편집감독님의 최애 장면은 ‘거울아 거울아’였나?
내 생각엔 ‘발차기’였던 것 같다. 발차기가 총 3번이 나오는데 처음, 중간, 끝에 딱 배치를 하셨다. 그걸 영화의 복선처럼 심어둔 것 같아서 ‘다큐멘터리에도 복선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고, 감독님이 천재라고 느꼈다.
Q. 첫 발차기 장면은 감독님과 어머니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순 님은 ‘이거 잘해서 얻는 게 있냐’ 하시는데 감독님은 ‘그래야 무시를 안 당한다’라고 응수한다. 어머니는 현실적인 보상을 중요시하고, 감독님은 사회적인 시선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차이일까 싶었다.
정말 그렇다. 근데 요즘은 나도 엄마처럼 변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안 떨어지는 일을 그냥 하라고? 적자는 안 돼, 가는 데 드는 기차 값은 줘야 해!’ 이러면서.(웃음) 그게 살면서 정말 중요한 거더라. 깨달으니 엄마가 너무 멋있었다.
Q.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 정말 멋지다.
그렇다. 나도 엄마를 보면서 ‘나의 노동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영화도 시급제였으면 좋겠다’ 생각도 했다.(웃음)
Q. 공순 님은 기술자인 동시에 가정에서 계속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동생들을 돌보는 맏이였고, 결혼 후엔 남매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기르며 집안을 건사했다.
동생과 외가 식구들이 다 영화에 등장하긴 하지만 말하는 게 아주 길게 나오지는 않는다. 외가 식구들은 명절마다 모이는데, 힘든 일을 같이 겪은 사람들 사이의 전우애가 있는 것 같다. 모일 때마다 늘 어릴 때 얘기를 하면서 운다. 나로선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안 들어도 될 것 같을 정도다. 당시에도 이모들한테 평소처럼 해달라고 해서 촬영을 하긴 했는데, 우는 모습이나 사연 얘기하는 걸 깊게 다루지는 않았다. 다 빼버렸다. 나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웃음 나고 당당했으면 했다. 우는 장면이 많으면 불쌍한 영화가 될 것 같아서 싫었다.
Q. 눈물 자체는 괜찮지 않을까? 보면서 공감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많을 것 같은데.
공감의 눈물은 괜찮다. 그저 ‘불쌍해서 어떡해’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일 두렵다.
Q. 영화를 본 이들과 얘기했을 땐, 불쌍하다고 대상화하기 보다는 공순 님을 통해 각자의 기억을 소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만해도 영화를 보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육남매 중 첫째인데 할머니가 생리대를 챙겨줘야 한다는 걸 몰라서, 엄마가 그 한스러움은 자기만 알려고 이모들을 다 당신이 챙겼다고 했던 게.
똑같다. 나도 엄마랑 생리대 인터뷰한 게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여성들에게 바치는, 여성주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근데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재미있어야 한다면서 엄마가 직접 검토를 해서 재미없는 건 빼라고 했다. 우물가에서 동생들 생리대 빨던 얘기, 구더기 나오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생리대 갈며 힘들었던 얘기는 다 빼라고. 나한텐 그 얘기가 너무 충격이고 강렬해서 넣고 싶었는데, 주인공인 엄마의 생각과 ‘추구미’를 또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
Q. 주장을 관철하기 보다는 찍히는 대상의 의견을 물어보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상처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있으니까. 확인을 받아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이정애 선생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다들 나보다 똑똑해서 의견도 적극적으로 주신다. <꽝> 찍을 때는 이정애 선생님 자녀분에게도 촬영분 보여드리면서 의견 물어보고 그랬다. 재밌는 게 다들 내용보다는 당신이 예쁘게 나왔는지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래서인지 피드백 시간을 갖고 난 다음 촬영 때 되게 멋지게 꾸미고 나오기도 하고.(웃음)
Q. 딱 마음에 드는 핵심 장면을 찍었는데, 대상이 빼달라고 하면? 협상의 여지 없이 빼는 건가?
무조건 빼야 된다. 가차없이 바로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지금 편집본에서 엄마의 발차기 장면 중 팬티가 살짝 보이는 순간이 있다. 걱정이 돼서 물어봤더니 엄마는 오케이라는 거다. ‘엄마 마음이 진짜 오케이일까, 아니면 내 영화 잘되라고 꺼림칙한 걸 감수하는 걸까’ 지금까지도 걱정이 된다. 이제 어떻게 할지는 내 책임이다. 하루에 한번씩은 ‘개봉할 때는 그 장면을 빼야 하나? 아니면 바지 입고 다시 찍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괜찮다고 해도, 누군가 보고 엄마한테 악플이라도 달까봐. 그건 절대 싫다.

Q. 개인적으로 공순 님의 말투도 인상적이었다. 도배를 할 때는 경상도 말씨를 쓰시다가 길에서 광주 출신 할머니를 만나 순천 사람이라고 출신을 말할 때엔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더라. 80년대에 전라도 출신 소녀가 부산으로 가 일하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다.
맞다! 사투리를 알아야 그게 들릴 텐데,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아쉽다. 내레이션을 꼭 사투리로 하고 싶었다. 그쪽으로 영화를 풀어가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남성들에게는 경상도 사투리가 권력이 되고, 여성들은 수도권에 가면 사투리를 고쳐야 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 그게 싫었다. 경상도 사투리 쓴다고 하면 ‘오빠야’ 불러보라고 시키고, 사회에 진출하려면 내 원래 말씨를 숨겨야 하고… 거기다 전라도 사투리엔 또다른 층위가 있지 않은가. 당시 부산에 일하러 간 전라도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전라도에는 공장이 많이 없으니까. 노가다 현장 사람들보다 집주인들이 무시를 많이 했다고 한다. 엄마도 차별을 겪었기 때문에 자꾸 사투리를 숨기고 부산 사람인 척하려 했다. 현장에 엄마를 따라가서 보니까 완전 부산 아저씨 사투리를 쓰더라.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엄마의 방식이었던 거다. 가끔 영화를 보고 말을 걸어주는 분들이 계시다. 전라도 출신인데 구로공단에 가서 일했어요, 구미에 가서 일했어요… 엄마처럼 힘든 시간을 견뎌온, 전라도 ‘공순이’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시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일하시는 분들은 바빠서 보러 못 오신다. 공짜라고 해도 안 오신다.(웃음) 생업 때문이니 막 끌고 오기도 힘들다. 솔직히 나한테는 개봉보다도 이분들에게 어떻게 영화가 가닿게 할지가 고민이다.
Q. 공순 님과 순천에도 갔다. 엄마의 고향이 주는 영감이 있었을지도 궁금했다.
처음엔 집이 남아있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터만 있는 이미지도 좋았다. 마을 분들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다들 “버버리 딸 공순이 고생 많이 했지”라며 불쌍하게만 기억하시더라.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인터뷰들을 다 뺐다. 이야기 들어 보니까 엄마가 어릴 때 우물가에서 빨래를 대신 해주고 100원, 200원 받아서 동생들 맛있는 거 사주는 게 일상이었더라. 엄마가 그 시절을 연기하는 장면도 너무 마음 아프고 불쌍한 낙인 같아서 빼고 싶었는데, 엄마가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해서 결국 넣었다.
Q. 재연 후 진짜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가 당황한 듯 얼른 엄마를 찍는 순간이 연결되면서 주는 완결성과 감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비롯해서 헤드룸이 없을 정도로 인물과 가까운 데서 핸드헬드로 찍은 장면들의 힘이 엄청 컸다.
처음에는 카메라는 흔들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흔들린 컷은 다 휴지통에 버렸다. 근데 촬영 2년 차 때 그게 패착이라는 걸 알았다. 이 영화의 핵심은 그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 내 진심인 건데, 무작정 예쁘고 안정감 있는 영화만 고집했던 거지. 나중엔 휴지통에서 다 다시 꺼내왔다. 관객 분들은 속일 수 없다. 진심을 다 알아보신다.
Q.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공순 님을 한참 동안 담은 화면들도 울림을 준다.
표정을 짓지 않는 ‘공순이’를 무조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을 때 엄마가 직접 찍은 컷들이 사실 다 2~4시간 가량 된다. 영화에는 짧게 편집되어 들어갔지만. 그 컷들의 99%가 무표정이다. 엄마는 카메라를 의식한 채 앞에 설 때만 웃는다. 무표정이야말로 진짜 엄마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중간중간 넣었다.
Q.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어머니가 코다(CODA)라는 점이다. 영어 제목에도 외할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할아버지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연상케 하는 ‘고라니(Water Deer)’가 사용됐다.
엄마가 남을 잘 웃겨주고 당당한 사람이 된 데엔, 코다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체화된 행동양식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 앞에선 재미있는 말만 하고, 사람들에게 웃어주고, 힘든 티 내지 않고… 코다라는 운명에서 ‘공순이’가 비롯되었다고 봤다. 영어 제목으로 쓴 고라니도 내겐 엄마를 연상하게 한다. 고라니가 정말 신기한 동물이다. 한국에 90% 이상이 서식한다. 한국에만 있는 ‘공순이’처럼. 그리고 수영을 하기 부적합한 몸인데도 천적을 피해 수영까지 해서 살아남는다. 그 모습이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공순이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Q. 정동진독립영화제를 함께 만드는 이들에게 코다는 먼 존재가 아니다. 김진유 집행위원장도 코다이고 수어통역도 코다 통역사들로 이루어진 코다피플이 진행한다.
그분들이 어떻게 영화를 보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엄마는 시골 출신이고 옛날 사람이라 공식 수어를 아예 못하고 가족끼리 아는 제스처만 쓴다. 그나마도 음식은 디테일한 제스처가 없어서 ‘김치’ 하나 말할 수 있다. 공식 수어를 아는 코다 분들이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쓰던 제스처를 보면 놀라실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나도 공부를 해서 이런 케이스가 엄마 말고도 있다는 걸 안다. 수어를 아는 코다와 모르는 코다를 부르는 명칭도 각각 있더라.
Q. 영화의 마지막은 감독님이 공순 님을 일방적으로 찍은 화면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이 바닷가에 서 있는 장면이 장식한다.
원래는 노을 질 때 다대포 바다 인서트를 따러 간 거였다. 아빠랑 찍은 유일한 사진 배경이 다대포거든. 마침 엄마가 일이 끝났다고 연락을 줘서 같이 갔는데, 해가 다 져서 촬영도 못할 것 같고 그냥 같이 바다나 보며 얘기를 했다. 습관처럼 녹화 버튼을 눌러둔 덕에, 촬영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그 컷을 발견했다. 엄마도 나도 웃고 있고 내레이션을 넣기에도 딱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엔딩으로 쓰게 됐다. 어두운 화면은 색보정 감독님이 힘써서 살려 주셨다.
Q. 이어지는 엔딩 크레딧 영상도 눈길을 끈다. 풍경 스틸인 줄로 알았는데, 프레임 바깥에서부터 일하는 공순 님이 걸어들어온다.
그 장면은 사실 굉장히 오랜 기간 이 영화의 인트로였다. 근데 편집감독님이 다 빼버리셔서(웃음) 내가 슬쩍 마지막에 넣었다.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님들과 이야기해 보니, 나 말고도 정지된 앵글 속으로 인물이 들어오는 연출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대상에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만 만나는 장면이라서 그런 것 같다.
Q. 앞으로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다. 이미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일까?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GV때 우연찮게 나온 아버지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듯한 모습을 봤다.
솔직히 아직 아빠에 대한 콤플렉스와 인정 욕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난 왜 이러지, 왜 아직도 아빠한테 칭찬 받고 싶어하는 거지 싶어서 스스로도 막 화가 날 때가 있다. <공순이>를 본 사람들이 꼭 내가 아빠를 악당으로 생각하고 미워하길 바라는 것 같을 때가 있는데, 나는 그게 쉽게 되지가 않는다. 우리 아빠는 대체 날 어떻게 구워삶은 거람. 아빠가 신인 줄로만 알았던 시절의 내가 아직도 지금의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나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난 왜 이럴까 싶어서 논문도 찾아보고 글을 많이 읽었다. 나처럼 아빠를 우상화하느라 엄마를 등한시하는 혼란을 겪은 딸들이 꽤 많은 것 같더라. 이 고민을 작품으로 다뤄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 <공순이>가 사적 다큐다 보니까 만들면서 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서 더 이런 마음이 드나 싶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내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소중한 직업이다. 말을 잘하진 못해도 남의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라 그런가? 지금으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다음 작품으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Q. 사적 다큐멘터리의 힘은, 가장 구체적인 내 이야기가 세상의 돋보기이자 현미경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내 이야기’를 통해 ‘네 이야기’도 불러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꼭 방방곡곡의 ‘공순’들이 영화를 보시면 좋겠다.
진짜 내 소원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분들인데, 자꾸 5~60대 남성 관객들이 보고 꼬박꼬박 GV도 참여하신다. 엄마에게 이입하기보다 남편(아버지) 쪽에 이입을 하시는지 “아빠가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김공순이란 이름이 안 부끄러워요?” 같은 질문이 매번 나온다. 이혼한 여성이 웃고 당당하게 사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 화도 난다. 일하는 여성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봐주시고 함께해 주시면 좋겠다. 물론 그분들을 극장까지 모셔오기가 쉽지 않긴 한데. 지금까지 발견한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딸’이다. 딸이 가자고 하면 간다. 부탁합니다, 저와 같은 따님 여러분!(웃음)
인터뷰 / 김송요
사진 / 강태욱
알아야 사랑하게 된다는데 몰라도 미워 못할 사람이 있다.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데 나에 대해 모르는 것 없는 사람이 있다. 유소영 감독에게는 엄마가 그런 사람이다. 한때는 부끄러웠지만 어느덧 나의 자랑이 되어버린, 똑똑하고 재미있고 고집스럽고 귀여운 공순 씨.
유소영 감독은 영화를 찍으면서 엄마 ‘공순’을 롤모델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많은 ‘공순’들에게, 또 더 많은 모녀들에게 이 영화가 가닿기를 바란다.
Q. 이전 작품 <꽝>도 노동하는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다. <공순이>를 보고 나니, 중년 여성과 노동에 관한 영화를 찍은 데에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기획 당시엔 전혀 없었다. <꽝>의 주인공인 이정애 선생님을 보면서 엄마랑 조금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외모도 비슷하고 눈빛도 비슷했다.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무슨 일을 할까? 맨날 밖에 나가는 걸 보면 무슨 일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일이 뭘까?’ 궁금해졌다.
Q. 영화 속 내레이션으로도 언급하지만, 그전에는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아예 몰랐다고 하면 사람들이 안 믿는다.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된 건데, 엄마가 의도적으로 가계 문제를 숨겼던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는지도 말을 안 하고, 우리집이 월세라는 것도 말 안 하고, 반면 아빠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식으로 늘 말했었다. ‘네가 할 일은 공부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주입당한 사고방식이 ‘부모 일은 부모 일, 자식 일은 자식 일. 자식이 되어서 부모 일에 간섭하지 마라’였다. 하도 그 말을 많이 듣고 살아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다른 가정은 다르게 사는구나, 난 너무 우리 가족의 방식에만 익숙했던 거였구나’ 하는 걸 찍으면서 알게 됐다. 영화를 본 분들이 늘 ‘어떻게 엄마 하는 일을 딸이 모를 수 있어?’ 하는데, 나는 정말 몰랐다.
Q. 그 정도로 말씀을 안 하셨으면, 처음 어머니에게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거부하거나 망설이는 반응이 나왔을 법도 한데.
<꽝>이 한창 영화제 상영을 할 때 엄마를 많이 데리고 다녔다. 엄마랑 이정애 선생님도 친해졌다. 그렇게 3명이서 다니다 보니까 엄마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멋있다’하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 같다.
Q. 오랜 기간 준비한 만큼 촬영 소스가 많다. 인터뷰, 이동하는 모습, 일하는 모습, 주변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 등등. 그런데 대부분의 장면에서 유소영 감독 본인은 어깨만 걸린 채거나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꽝> 같은 영화를 또 만들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촬영자는 그림자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촬영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 피칭을 하면서 다른 분들 의견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이렇게 딸이 그림자로만 존재하면 단편에 그치는 영화다. 욕심이 있고 장편으로 만들고 싶으면 딸이 들어가야 된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때부터 뒤에서 말도 해보고, 슬쩍 등장하기도 했다. 집에 있으면 무조건 녹화를 켜둔 뒤 일상생활을 하며 언제 어디서건 일단 계속 찍었다.
Q. ‘딸이 등장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에 설득이 된 거다.
그렇다. 단편영화는 개봉 확률이 현저히 낮은데, 엄마는 항상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만들어라’고 했거든. 지금 결과물은 <국제시장>이랑 완전 딴판이지만, ‘엄마가 느끼기에 비슷하게라도 하려면 장편을 찍어야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장편으로 만들려면 내가 영화 안에 들어가야 하겠구나’ 결단을 했다. 그 이후론 사리지 않고 찍었다.
그럼에도 내가 뒷모습이나 신체 일부로만 등장하는 건, 처음에 <꽝>을 염두에 두고 촬영할 때 다 보이스오버로 처리할 것을 계획하고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잘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Q. 관객으로서 그 또한 의도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집 촬영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앵글이 모퉁이에 앙각으로 카메라를 놓고 공순 님에게 포커스를 맞춘 화면이다. 그게 꼭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족을 찍는 일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최대한 멀찍이서 찍으려고 한 것 같지만 실은 이미 집이라는 사적 바운더리 안에 들어와 카메라를 놓았음을 보여주는, 모녀 관계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감독님은 화면 구석에 있지만, 구석이라고 해봐야 몇 걸음 걸으면 금세 공순 님에게 닿을 정도의 거리감이다.
솔직히 당시엔 마이크 방향이 나와 엄마를 향해 있느냐만 중요했다. 나는 화면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목소리만 따서 예쁘게 편집하려고 했다. 촬영을 이어가던 중 ‘이 영화는 진심이 안 통하면, 허세 같아 보이면 외면받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을 예쁘게 꾸며낼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상하다고 폐기했던 장면도 마음이 담겨 있다면 다 넣자고 결정했다. 휴지통에 있는 거 다 꺼내고, 내가 예쁘지 않다고 버렸던 것들 다 다시 건져서 만든 게 지금의 영화다. 정직하게 말하면 의도하고 잡은 앵글이 아니지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Q.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 결심한 씬 이후로는 공순 님과 감독님이 아이 레벨에서 동등하게 위치하고, 측면이든 후면이든 비슷한 비중으로 담기는 장면들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이게 감독님의 변화를 드러내는 걸 수도 있겠다고 추측했다.
맞는 것 같다. 내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많다. 일단 엄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됐다. 도배 일을 한다는 것도 몰랐다. 엄마가 해운대 센텀에 청소하러 나간다고 말하곤 했는데, 별로 깊이 알고 싶지 않아서 ‘아, 우리 엄마는 청소 일 하나보다’ 하고 말았었다. <공순이>를 찍으러 가서 보니까 엄마가 일하는 모습이 진짜 멋있었다. 일당도 진짜 많이 받고. 처음부터 잘했을 것처럼 능숙하고 노련했다. 근데 엄마 동료 아저씨들이 그랬다. “너는 엄마가 능력자 됐을 때 보러 와서 잘하는 것만 봐가지고 모르는 거다. 너희 엄마가 처음에 이 일 시작할 때 맨날 욕 들어먹고 차 안에서 혼자 우는 걸 봤어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책임감도 부족하고 힘든 일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잘할까. 아니,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잘하게 되었을까. 그 생각을 하며 계속 엄마를 찍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이고, 어디서든 말발로 일감을 따낸다. 우리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카페에 와도 벽지며 시멘트를 하나하나 다 지적하면서 일을 받아낼 사람이다. ‘내가 배워야할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구나, 엄마를 롤모델로 삼아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비단 일이 아니어도, 평상시 대화 주제도 많아졌다.
Q. 작품 안에서도 어머니가 인생 선배로서 하는 조언이 있다. ‘사람이 너무 보상 없는 노동만 하면 지친다’처럼. 이전에는 그런 말씀도 삼가셨을까?
작품 하면서 처음 들었다.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전에는 그냥 엄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상으로 남겨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보면서 ‘엄마가 나를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구나,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었구나’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엄마는 항상 같았을지 모른다. 그저 내가 엄마 말을 처음으로 귀기울여 들은 걸지도. 근본적으론 내가 엄마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Q. 영화를 보며, 공순 님에게 감독님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란 걸 느꼈다. ‘우리 딸이 나보다 예쁘고, 다리도 길고, 손도 예쁘고, 대단한 영화감독이다’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도 카메라로 어머니를 담으면서 발견할 수 있던 마음이 아니었을지 생각했다.
엄마의 마음이 찡하면서도, 엄마의 유일한 자랑이 딸이 되는 건 또 너무 싫다. 그냥 김공순 본인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내가 더 예쁘다고 한다. GV에서도 매번 그러는데 그게 내 눈물 버튼이라서, 요즘 눈물바람으로 GV를 하고 그런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GV를 하면 좀 슬프기도 하다. 엄마들은 다 이런가 싶고, 아님 우리 엄마가 유독 나 아빠 없이 자랐으니 감싸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나 싶고.
Q. 이제 그러지 말라고 말씀은 드려 봤나.
교육이 절대 안 된다. 몇 번 말했는데, 엄마의 행동이나 말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Q. 영화엔 촬영 소스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수집한 푸티지도 많다. 신발 공장 여성 노동자 관련 기사 스크랩이나 기념비, 어머니 생활기록부와 일기장 등등.
열심히 모았다. 종류별로 폴더가 쫙 있다. 엄마 일기는 ‘다큐 찍어야 되니까 일기를 좀 써줘’ 요청한 건데, 정말 성실하게 잘썼다. 초반엔 엄마의 일기로 진행되는 9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 편집본도 있다. 지금 버전으로 완성하면서 서랍 안에 잠든 일기들이 가끔 아쉽다.
Q. 일기 속 소개하고 싶은 구절이 있을까?
진짜 시적인 게 많다. 엄마 말로는 편지 세대라서 엄마 친구들도 다 글을 잘쓴다고 한다. 구절을 떠올려 보면… 이를테면 엄마는, ‘행복한 여름밤 보내세요’가 아니라 ‘행복한 꽃밤 보내세요’라고 쓴다. 꽃밤이라는 단어는 잘 안 쓰지 않나? 감탄하면서 읽었다.
Q. 편집되기는 했지만 작품 안에 여전히 잠깐씩 일기장이 등장한다. 어머니, 그러니까 유소영 감독의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평서문이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아라리오’하고 끝난다. 공순 님의 감수성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그렇게 안 쓰지 않나? 엄마 글에선 갑자기 그런 요소가 튀어나온다.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 ‘뭐든지 재미가 있어야 한다’다. 사람들은 조금 어색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거나 갑자기 바보 같이 굴면 웃는다면서, 늘 타인을 웃겨주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게 몸에 배어 있다. 나는 그게 엄마의 가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가졌던 무기 같기도 하고. 삶이 곧 투쟁이니까 남을 웃겨야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찾아주지 않았을까 싶다.
Q. 영화 속에도 어머니의 매력 포인트가 담긴 장면이 많다. 거울 앞에서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하시는 장면도 관객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
그러게 말이다! 난 오글거리는 것 같아서 안 넣고 싶었는데 편집감독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이 영화는 편집감독님에 의해서 마술처럼 다시 살아났다.
Q. 편집 과정이 어땠기에?
앞서 말한 일기 버전을 비롯 몇몇 버전 중에서 지금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후 내가 모은 푸티지를 전부 다 보여드리고, 도무지 순서를 못 정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나에겐 김공순이라는 사람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기에 앞서 엄마기 때문에, 정말 처음 본 낯선 아줌마로 바라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편집을 이연정 감독님이 해주셨다. 좋은 작품 워낙 많이 편집하시지 않았나. 시간 안 된다는 거 꾸역꾸역 졸라서, 감독님 편집실 앞에 숙소를 잡아놓고 한 달 동안 편집에 매달렸다. 감동적이었던 게, 감독님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면서 편집해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니 정말 경이로웠다. 덕분에 믿고 맡겼다.
Q. 그럼 감독님의 최애 픽과 편집감독님의 최애 픽 장면은 각각 무엇이었나?
내 최애 픽은 들어가지 않았다. 빼버렸다. 엄마와 할머니 무덤에 갔다가 정리하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엄마 부르고 싶다. 엄마!”하고 외치는 거다. 그러고선 “엄마를 생전 처음 불러본다. 나는 엄마더러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엄마라고 부르니까 너무 좋다”라고 했다. 나는 그 장면에 감동받아서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마지막 장면 같은 느낌? 하하. 그런데 편집감독님이 “공순 님이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한번 보는 게 너무 연기 같다. 이거는 빼야 된다”라고 하셨다. 한순간이라도 진심이 안 느껴지면 안되는 영화라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빼버렸다.
Q. 그럼 편집감독님의 최애 장면은 ‘거울아 거울아’였나?
내 생각엔 ‘발차기’였던 것 같다. 발차기가 총 3번이 나오는데 처음, 중간, 끝에 딱 배치를 하셨다. 그걸 영화의 복선처럼 심어둔 것 같아서 ‘다큐멘터리에도 복선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고, 감독님이 천재라고 느꼈다.
Q. 첫 발차기 장면은 감독님과 어머니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순 님은 ‘이거 잘해서 얻는 게 있냐’ 하시는데 감독님은 ‘그래야 무시를 안 당한다’라고 응수한다. 어머니는 현실적인 보상을 중요시하고, 감독님은 사회적인 시선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차이일까 싶었다.
정말 그렇다. 근데 요즘은 나도 엄마처럼 변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안 떨어지는 일을 그냥 하라고? 적자는 안 돼, 가는 데 드는 기차 값은 줘야 해!’ 이러면서.(웃음) 그게 살면서 정말 중요한 거더라. 깨달으니 엄마가 너무 멋있었다.
Q.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 정말 멋지다.
그렇다. 나도 엄마를 보면서 ‘나의 노동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영화도 시급제였으면 좋겠다’ 생각도 했다.(웃음)
Q. 공순 님은 기술자인 동시에 가정에서 계속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동생들을 돌보는 맏이였고, 결혼 후엔 남매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기르며 집안을 건사했다.
동생과 외가 식구들이 다 영화에 등장하긴 하지만 말하는 게 아주 길게 나오지는 않는다. 외가 식구들은 명절마다 모이는데, 힘든 일을 같이 겪은 사람들 사이의 전우애가 있는 것 같다. 모일 때마다 늘 어릴 때 얘기를 하면서 운다. 나로선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안 들어도 될 것 같을 정도다. 당시에도 이모들한테 평소처럼 해달라고 해서 촬영을 하긴 했는데, 우는 모습이나 사연 얘기하는 걸 깊게 다루지는 않았다. 다 빼버렸다. 나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웃음 나고 당당했으면 했다. 우는 장면이 많으면 불쌍한 영화가 될 것 같아서 싫었다.
Q. 눈물 자체는 괜찮지 않을까? 보면서 공감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많을 것 같은데.
공감의 눈물은 괜찮다. 그저 ‘불쌍해서 어떡해’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일 두렵다.
Q. 영화를 본 이들과 얘기했을 땐, 불쌍하다고 대상화하기 보다는 공순 님을 통해 각자의 기억을 소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만해도 영화를 보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육남매 중 첫째인데 할머니가 생리대를 챙겨줘야 한다는 걸 몰라서, 엄마가 그 한스러움은 자기만 알려고 이모들을 다 당신이 챙겼다고 했던 게.
똑같다. 나도 엄마랑 생리대 인터뷰한 게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여성들에게 바치는, 여성주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근데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재미있어야 한다면서 엄마가 직접 검토를 해서 재미없는 건 빼라고 했다. 우물가에서 동생들 생리대 빨던 얘기, 구더기 나오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생리대 갈며 힘들었던 얘기는 다 빼라고. 나한텐 그 얘기가 너무 충격이고 강렬해서 넣고 싶었는데, 주인공인 엄마의 생각과 ‘추구미’를 또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
Q. 주장을 관철하기 보다는 찍히는 대상의 의견을 물어보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상처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있으니까. 확인을 받아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이정애 선생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다들 나보다 똑똑해서 의견도 적극적으로 주신다. <꽝> 찍을 때는 이정애 선생님 자녀분에게도 촬영분 보여드리면서 의견 물어보고 그랬다. 재밌는 게 다들 내용보다는 당신이 예쁘게 나왔는지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래서인지 피드백 시간을 갖고 난 다음 촬영 때 되게 멋지게 꾸미고 나오기도 하고.(웃음)
Q. 딱 마음에 드는 핵심 장면을 찍었는데, 대상이 빼달라고 하면? 협상의 여지 없이 빼는 건가?
무조건 빼야 된다. 가차없이 바로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지금 편집본에서 엄마의 발차기 장면 중 팬티가 살짝 보이는 순간이 있다. 걱정이 돼서 물어봤더니 엄마는 오케이라는 거다. ‘엄마 마음이 진짜 오케이일까, 아니면 내 영화 잘되라고 꺼림칙한 걸 감수하는 걸까’ 지금까지도 걱정이 된다. 이제 어떻게 할지는 내 책임이다. 하루에 한번씩은 ‘개봉할 때는 그 장면을 빼야 하나? 아니면 바지 입고 다시 찍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괜찮다고 해도, 누군가 보고 엄마한테 악플이라도 달까봐. 그건 절대 싫다.
Q. 개인적으로 공순 님의 말투도 인상적이었다. 도배를 할 때는 경상도 말씨를 쓰시다가 길에서 광주 출신 할머니를 만나 순천 사람이라고 출신을 말할 때엔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더라. 80년대에 전라도 출신 소녀가 부산으로 가 일하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다.
맞다! 사투리를 알아야 그게 들릴 텐데,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아쉽다. 내레이션을 꼭 사투리로 하고 싶었다. 그쪽으로 영화를 풀어가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남성들에게는 경상도 사투리가 권력이 되고, 여성들은 수도권에 가면 사투리를 고쳐야 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 그게 싫었다. 경상도 사투리 쓴다고 하면 ‘오빠야’ 불러보라고 시키고, 사회에 진출하려면 내 원래 말씨를 숨겨야 하고… 거기다 전라도 사투리엔 또다른 층위가 있지 않은가. 당시 부산에 일하러 간 전라도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전라도에는 공장이 많이 없으니까. 노가다 현장 사람들보다 집주인들이 무시를 많이 했다고 한다. 엄마도 차별을 겪었기 때문에 자꾸 사투리를 숨기고 부산 사람인 척하려 했다. 현장에 엄마를 따라가서 보니까 완전 부산 아저씨 사투리를 쓰더라.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엄마의 방식이었던 거다. 가끔 영화를 보고 말을 걸어주는 분들이 계시다. 전라도 출신인데 구로공단에 가서 일했어요, 구미에 가서 일했어요… 엄마처럼 힘든 시간을 견뎌온, 전라도 ‘공순이’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시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일하시는 분들은 바빠서 보러 못 오신다. 공짜라고 해도 안 오신다.(웃음) 생업 때문이니 막 끌고 오기도 힘들다. 솔직히 나한테는 개봉보다도 이분들에게 어떻게 영화가 가닿게 할지가 고민이다.
Q. 공순 님과 순천에도 갔다. 엄마의 고향이 주는 영감이 있었을지도 궁금했다.
처음엔 집이 남아있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터만 있는 이미지도 좋았다. 마을 분들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다들 “버버리 딸 공순이 고생 많이 했지”라며 불쌍하게만 기억하시더라.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인터뷰들을 다 뺐다. 이야기 들어 보니까 엄마가 어릴 때 우물가에서 빨래를 대신 해주고 100원, 200원 받아서 동생들 맛있는 거 사주는 게 일상이었더라. 엄마가 그 시절을 연기하는 장면도 너무 마음 아프고 불쌍한 낙인 같아서 빼고 싶었는데, 엄마가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해서 결국 넣었다.
Q. 재연 후 진짜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가 당황한 듯 얼른 엄마를 찍는 순간이 연결되면서 주는 완결성과 감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비롯해서 헤드룸이 없을 정도로 인물과 가까운 데서 핸드헬드로 찍은 장면들의 힘이 엄청 컸다.
처음에는 카메라는 흔들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흔들린 컷은 다 휴지통에 버렸다. 근데 촬영 2년 차 때 그게 패착이라는 걸 알았다. 이 영화의 핵심은 그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 내 진심인 건데, 무작정 예쁘고 안정감 있는 영화만 고집했던 거지. 나중엔 휴지통에서 다 다시 꺼내왔다. 관객 분들은 속일 수 없다. 진심을 다 알아보신다.
Q.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공순 님을 한참 동안 담은 화면들도 울림을 준다.
표정을 짓지 않는 ‘공순이’를 무조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을 때 엄마가 직접 찍은 컷들이 사실 다 2~4시간 가량 된다. 영화에는 짧게 편집되어 들어갔지만. 그 컷들의 99%가 무표정이다. 엄마는 카메라를 의식한 채 앞에 설 때만 웃는다. 무표정이야말로 진짜 엄마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중간중간 넣었다.
Q.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어머니가 코다(CODA)라는 점이다. 영어 제목에도 외할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할아버지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연상케 하는 ‘고라니(Water Deer)’가 사용됐다.
엄마가 남을 잘 웃겨주고 당당한 사람이 된 데엔, 코다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체화된 행동양식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 앞에선 재미있는 말만 하고, 사람들에게 웃어주고, 힘든 티 내지 않고… 코다라는 운명에서 ‘공순이’가 비롯되었다고 봤다. 영어 제목으로 쓴 고라니도 내겐 엄마를 연상하게 한다. 고라니가 정말 신기한 동물이다. 한국에 90% 이상이 서식한다. 한국에만 있는 ‘공순이’처럼. 그리고 수영을 하기 부적합한 몸인데도 천적을 피해 수영까지 해서 살아남는다. 그 모습이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공순이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Q. 정동진독립영화제를 함께 만드는 이들에게 코다는 먼 존재가 아니다. 김진유 집행위원장도 코다이고 수어통역도 코다 통역사들로 이루어진 코다피플이 진행한다.
그분들이 어떻게 영화를 보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엄마는 시골 출신이고 옛날 사람이라 공식 수어를 아예 못하고 가족끼리 아는 제스처만 쓴다. 그나마도 음식은 디테일한 제스처가 없어서 ‘김치’ 하나 말할 수 있다. 공식 수어를 아는 코다 분들이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쓰던 제스처를 보면 놀라실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나도 공부를 해서 이런 케이스가 엄마 말고도 있다는 걸 안다. 수어를 아는 코다와 모르는 코다를 부르는 명칭도 각각 있더라.
Q. 영화의 마지막은 감독님이 공순 님을 일방적으로 찍은 화면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이 바닷가에 서 있는 장면이 장식한다.
원래는 노을 질 때 다대포 바다 인서트를 따러 간 거였다. 아빠랑 찍은 유일한 사진 배경이 다대포거든. 마침 엄마가 일이 끝났다고 연락을 줘서 같이 갔는데, 해가 다 져서 촬영도 못할 것 같고 그냥 같이 바다나 보며 얘기를 했다. 습관처럼 녹화 버튼을 눌러둔 덕에, 촬영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그 컷을 발견했다. 엄마도 나도 웃고 있고 내레이션을 넣기에도 딱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엔딩으로 쓰게 됐다. 어두운 화면은 색보정 감독님이 힘써서 살려 주셨다.
Q. 이어지는 엔딩 크레딧 영상도 눈길을 끈다. 풍경 스틸인 줄로 알았는데, 프레임 바깥에서부터 일하는 공순 님이 걸어들어온다.
그 장면은 사실 굉장히 오랜 기간 이 영화의 인트로였다. 근데 편집감독님이 다 빼버리셔서(웃음) 내가 슬쩍 마지막에 넣었다.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님들과 이야기해 보니, 나 말고도 정지된 앵글 속으로 인물이 들어오는 연출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대상에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만 만나는 장면이라서 그런 것 같다.
Q. 앞으로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다. 이미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일까?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GV때 우연찮게 나온 아버지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듯한 모습을 봤다.
솔직히 아직 아빠에 대한 콤플렉스와 인정 욕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난 왜 이러지, 왜 아직도 아빠한테 칭찬 받고 싶어하는 거지 싶어서 스스로도 막 화가 날 때가 있다. <공순이>를 본 사람들이 꼭 내가 아빠를 악당으로 생각하고 미워하길 바라는 것 같을 때가 있는데, 나는 그게 쉽게 되지가 않는다. 우리 아빠는 대체 날 어떻게 구워삶은 거람. 아빠가 신인 줄로만 알았던 시절의 내가 아직도 지금의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나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난 왜 이럴까 싶어서 논문도 찾아보고 글을 많이 읽었다. 나처럼 아빠를 우상화하느라 엄마를 등한시하는 혼란을 겪은 딸들이 꽤 많은 것 같더라. 이 고민을 작품으로 다뤄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 <공순이>가 사적 다큐다 보니까 만들면서 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서 더 이런 마음이 드나 싶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내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소중한 직업이다. 말을 잘하진 못해도 남의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라 그런가? 지금으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다음 작품으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Q. 사적 다큐멘터리의 힘은, 가장 구체적인 내 이야기가 세상의 돋보기이자 현미경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내 이야기’를 통해 ‘네 이야기’도 불러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꼭 방방곡곡의 ‘공순’들이 영화를 보시면 좋겠다.
진짜 내 소원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분들인데, 자꾸 5~60대 남성 관객들이 보고 꼬박꼬박 GV도 참여하신다. 엄마에게 이입하기보다 남편(아버지) 쪽에 이입을 하시는지 “아빠가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김공순이란 이름이 안 부끄러워요?” 같은 질문이 매번 나온다. 이혼한 여성이 웃고 당당하게 사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고 화도 난다. 일하는 여성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봐주시고 함께해 주시면 좋겠다. 물론 그분들을 극장까지 모셔오기가 쉽지 않긴 한데. 지금까지 발견한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딸’이다. 딸이 가자고 하면 간다. 부탁합니다, 저와 같은 따님 여러분!(웃음)
인터뷰 / 김송요
사진 / 강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