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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JIFF22_5교시 영화수업_김보라 감독2020-08-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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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개봉한 첫 장편 <벌새>는 그야말로 길고 먼 비행을 했다. 수많은 관객이 <벌새>의 자장 안에서 감정을 나누었고,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되새겼다. 이번 제22회 정동진독립영화제 '5교시 영화수업' 두 번째 시간은 <벌새> 개봉 1주년을 앞두고 잔잔한 착륙과 대범한 이륙을 준비 중인 김보라 감독과 함께했다. 백은하 배우연구소장이 지음(知音)처럼 마음을 알아주는 진행을 맡았고, 사전 신청을 통해 결정된 열한 명의 참가자가 자리를 훈훈하게 채웠다. 

 

 

백은하(이하 백): 신청자 분들이 사전에 보내주신 이야기를 읽으면서, <벌새>라는 작품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영화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김보라 감독의 시선과 생각에 대한 궁금증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자리가 질문에 관한 정답이나 대답을 듣는 시간이기보다는 함께 고민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보라 감독님은 예고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학부에선 영상영화학을, 대학원에선 영화학을 공부하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오신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김보라(이하 김): 사실 그렇지는 않아요. 그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예고에 갔는데, 학교가 소위 선후배 위계질서가 강한 곳이어서 폭력적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것 때문에 학창시절 또한 딱히 기억하고 싶은 시절이 아니고요. 하지만 학교에서 좋은 희곡을 접하면서 영감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그때 좋아하던 손튼 와일러의 <우리 읍내>가 이후 좋아하게 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과 연결되는 면이 있단 걸 발견하고 재미있기도 했어요. 학교에서 배운 연극이 배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백: 한 참가자 분께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과에 입학했는데, 막상 내 작품을 만들려 하니까 어렵다'는 고민을 남겨 주셨어요. 특히 '이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고요.

 

김: 저도 항상 했던 고민이에요. <벌새>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이 기승전결이 없는 거 아니냐는 말을 많이 했어요. 제게는 정말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느껴지는데도, 그런 말을 많이 듣다 보니까 '이게 맞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엄마 아빠 다 있고, 남자친구도 있고, 자길 좋아하는 여자애도 있는 애가 뭐가 힘드냐'고 했어요. 주인공 은희의 결핍이 부족해 보인다는 거죠. 고통을 전시하고 끝까지 몰고 가는 폭력적 태도도 없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하고싶은 게 뭔지 생각했어요. 폭력으로 점철된 영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과하다고 느껴지는 폭력을 뺐고, 지금도 그 결정에 가슴 쓸어내려요. 이처럼 의문이 들 때면 나 자신을 믿으려 하고, 그게 잘 안될 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 확인을 받아요. 영화 전공자가 아니어도 좋은 의견을 줄 수 있죠. 제 이야기에 아예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애초에 제가 만든 영화와 제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들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으려 해요. 
대학원에서 받은 팁도 큰 도움이 됐는데, 열 명 중 아홉 명이 아니라고 하면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할 때는 창작자 스스로 그 의견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제게도 열 명 중 두어 명 꼴로 <벌새>를 영지와 은희의 버디무비로 만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너무 나오는 사람이 많다, 영화는 집중과 생략이 필요한 거 모르냐면서요. 근데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벌새>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벌새>는 은희를 둘러싼 소우주를 만드는 걸 목표로 한 영화니까요. 돈도 없는데 왜 시대극을 만들고 성수대교 붕괴 장면까지 넣으려고 하냐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제가 죽어도 이 영화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게 '1994년'이었기 때문에 의지를 관철했어요.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체한 기분이 들게 하는 피드백이 있어요. 그건 몸에 맞지 않는 피드백이고, 돌다리를 두들겨가며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슬쩍 준 피드백이지만 새겨듣고 배울 부분이 있기도 해요. 그런 피드백은 영화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요.

 

 

백: 김보라 감독님이 '뻔뻔한 여자가 되자'고 하신 것을 인상깊게 들었는데, 요즘 자꾸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참가자 분이 계세요. 

 

김: 다른 문화권에서는 '순한 맛' 수준의 발언도 한국 사회에서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어요.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는 제가 뭐라고 말을 보탤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선생님과 주변인들 사이에 옳고 그름에 대한 동의가 이뤄져 있고, 누군가 잘못된 태도를 보이면 선생님이 솔선수범 상황을 정리하시니까요. 근데 여기선 제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더라고요. 그렇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은 하려고 해요. '여자의 고통은 두 가지다, 말해서 당하는 고통과 말 안해서 속앓이하는 고통'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전자를 택하자, 모두에게 사랑받진 못하겠지만 나 자신에게만은 솔직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럼에도 자신감이 떨어질 떄는 명상을 해서 마음을 정화하려고 노력해요.

 

백: 또다른 참가자 분인데요,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하시네요. 이십 대 초반,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 무엇일지 감독님께 여쭙고 싶다고 하십니다.

 

김: 모든 걸 다 흡수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명상수업에서 '초심자의 마음'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 오늘 태어난 것처럼 하루하루를 새롭게 사는 마음가짐을 말해요. 처음 대학교에 입학해서 도서관에 갔을 때 소름돋게 좋았던 게 생각나요. '여기 있는 책 다 읽어야지' 생각하면서요. 실제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썼어요. 페미니즘 관련 활동도 하고, 인터넷 영화 커뮤니티와 영화 동아리도 했고요. 영화과 학생이 굳이 또 영화 동아리까지.(웃음) 스물한 살에는 화실을 다니기도 했고, 그 이후엔 문예창작과도 입학해서 잠시 다녔어요. 그 과정에서 느낀 게, 나는 결국 영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국 영화 공부를 더 하려 대학원을 갔고요. 갈팡질팡한 얘기를 털어놓는 게 부끄럽지만, 봤을 때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랑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다르다는 걸 해보고서야 알았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돈도 시간도 많이 들기에 리스크가 큰 방법이지만, 전 세 갈래 길 사이에서 너무 고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다 해봤어요. 요컨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는 것, 그리고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또 인정했을 때 깨닫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 안다고만 생각하면 사람도 영화도 별로가 되는 느낌이에요. 

 

백: 김보라 감독님은 단편 <리코더 시험>(2011) 이후 <벌새>를 개봉하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그만큼 다사다난했으리란 추측이 드는데요.

 

김: 정말 다사다난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요. <벌새> 리뷰 중에 좋았던 게, '되게 노력해서 만든 영화 같다, 나도 할 수 있단 자신감을 얻었다'예요. 영화를 보고 '와, 저 사람은 천재다, 나는 절대 저렇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보단 이게 좋은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천재도 천재대로 좋겠지만 저는 지금이 좋아요. 그리고 제겐 앞으로 어떤 개똥밭을 굴러도 괜찮을 거라는 자신이 있어요. <벌새>를 준비하면서 그야말로 바닥을 쳐봤기 때문에, 바닥을 치는 데 두려움이 없어졌거든요. 감독이 혼자 시나리오를 들고 투자사를 찾아가는 게 드문 일이라는데 저는 몇 번씩을 그렇게 했어요. 집에 오는 길에 외로워서 울기도 하고요. 같이 하기로 한 사람들과의 지향점이 달라 못하게 된 일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시대극이다 보니 다른 독립영화보다 시간이며 돈,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 당연한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해서인지 유독 힘들었어요. 사람이 몇 년씩이나 잘 안 되면 되게 작아지더라고요. 이젠 그 모든 과정이 축복이었다고 생각하려 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저 자신을 더 잘 알게 됐으니까요. 덕분에 두려움을 직면하고 확장되는 기쁨도 느꼈고, 가족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백: <벌새> 시나리오북에서 '가짜 평화'라는 표현을 보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참가자 분이 계셨어요. 오래전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묵혀뒀었는데, 이 단어를 보고 정확하게 그 감정과 상황을 읽어낼 수 있으셨다고 해요. <벌새>를 보면서, 가짜 평화의 막을 부수고 온전한 사랑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김: 사실 전 제가 편하자고 가족에게 말을 건 거예요. 가족들과 얘기하지 않으면 제가 못 살겠어서. 20대부터 매일같이 아빠에게 가부장적 성향을 버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지적을 했어요. 그게 통했는지 아빠가 진짜 사과를 했고요. 아빠의 사과를 스무 번 넘게 들었어요. 올해도 당신이 완벽한 아빠가 아니어서 미안하지만 완벽하지 못함을 이해해달라, 아빠도 너희를 키울 때는 너무 어렸다면서 사과를 하시더라고요. 아빠의 사과를 받아서 정말 좋아요. 안 그랬음 속이 문드러졌을 거예요. 또 사과를 여러 번 받았더니 받을 때마다 분노가 연해져서 지금은 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됐고요. 여전히 아빠가 다른 여성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일 때면 마음이 서늘해지고 '우리 가족 최고'라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제게 큰 의미가 있었어요. 제 삶의 뿌리가 채워지고, 용서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가해자였던 순간을 참회하기도 했고요. 앞으로의 삶에서도 가짜 평화를 마주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늘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대응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고요. 애초에 제가 선택한 방식이 누구에게나 맞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으로 풀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끊어내는 게 나은 관계도 있을 거예요. 정답은 없다고 봐요.

 

백: 서로 연결되는 질문들이 있었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마치 일기장 같다는 의심 들 때가 있다는 분, 본인 경험을 적다 보면 과몰입하게 되어서 타인의 공감을 얻기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염려된다는 분이 계셨어요. 김보라 감독님은 어떻게 자전적 이야기와 보편적인 공감대 사이의 적정선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솔직히 이젠 <벌새>가 자전적이란 생각이 잘 안 들어요. 은희를 저와 완전히 동일시해서 영화를 본 뒤 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말 황당하더라고요. 가족이라거나 감정선 등 은희의 일부는 저와 맞닿아 있지만, 은희가 맺은 관계를 비롯 여러 부분은 창작이에요. <벌새>를 완성해 가면서 제게 중요한 건 얼마나 잘 만드냐, 즉 만듦새였어요. 인물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를 넣고 빼야 할지, 그게 전체 스토리라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서 수많은 편집본을 만들었어요. 처음엔 수희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러다 보니 영화가 로버트 알트만 스타일의 멀티플 캐릭터 플레이에 가까워져서, 한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 수희 부분을 덜어내고 은희에 더 집중하는 선택을 했어요. 실상 수학에 가까운 작업이었죠. 공정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숏을 구성하고… 그러다 보니 나중엔 '이건 내 얘기'라는 생각보단 작업공정에 임하고 있단 마음이 더 컸어요.

 

 

백: 김보라 감독님은 여성감독으로 정체화되고 소개되곤 해요. 여성감독, 그리고 여성영화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김: 사실 단순한데, 제가 여성감독으로 정체화된 건 여성감독이라고 불려서예요. 여성영화를 만든다는 말도 제 영화를 여성영화로 불러서일 거고요. 남성감독, 남성영화라는 말과 달리 아예 없잖아. 우리 세대에선 아직 여성영화란 말 쓰고 기획전하고 이러지만 십 년 후쯤엔 그러지 않았으면. 하지만 지금은 전략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 소수자고 뭔가 태동하는 시기라서. 남성의 시선male gaze를 벗어나 다른 시야를 보여주는 작품이 여성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 감독이 만들면 다 남성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고 봐요. <하나 그리고 둘>같은 영화가 그 예일 거고요. 다만 이런 건 있어요. 여성 감독의 영화는 마음 편히 보러갈 수 있는데, 남성 감독 영화를 보러갈 땐 대개 상처받을 준비를 미리 하게 돼요.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폭력을 게임처럼 사용하는 영화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개연성 면에서도, 미학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백: 동시대 여성들과 나눌 말씀 한 마디를 부탁한 분도 계셨어요.

 

김: 여성에겐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가 있는 건데, 한국 사회는 여성이 찌그러져 살길 요구해요. 놀라울 정도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요. 단적으로 어느 집단에서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경험하거나 목격할 수 있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여성이라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사회예요. 세상이 잘 안 바뀌니까 이 화에 잠식되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저 정신승리로 행복하게 룰루랄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저도 어쩌면 좋을지, 사실 답을 모르겠어요. 다만 화가 나는 게 자연스럽단 걸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것도 꼭 필요하고요. 어떨 땐 일부러 뉴스를 안 보기도 해요. 저는 명상을 즐겨하는데, 사실 명상 가르침 중에도 여자에게 차별적인 것이 있거든요. 그럴 땐 내용을 여성주의적으로 필터링하면서, 현실적인 삶과 영적인 삶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해요. 저는 여자들이 이 사회의 패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성 가해자들이 승리자가 아닌 것처럼요. 대학원을 다닐 때,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가정에서 나고 자란 백인 이성애자 남자들이 텅 빈 얼굴을 한 채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곤 했어요.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런 얼굴이 나오는 거예요. 전 제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가해와 피해라는 대립구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비록 어렵지만 많이 생각하려 하고요.

 

백: '감독님은 영화로 세상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질문하신 분이 계세요. 질문자 분 본인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득 '내가 허황된 걸까' 싶어지기도 하신다고요.

 

김: 저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어릴 때는 이런 말을 잘 못했는데, 점차 세상을 사는 데 돈이 다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이런 말이 오글거리게 들릴 수 있지만, 저는 영화를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밥 먹여주냐고들 하는데, 이게 직업이니까 실질적 밥도 먹여주지만(웃음)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중요한 양분이라고 생각해요. 세상물정을 알면 알수록,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사는 데엔 돈이 꼭 필요하고 정말 힘이 들 때는 예술을 향유하기 어렵겠지만, 우울할 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도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백: 감독님의 차기작을 비롯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SF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계시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 SF물의 트리트먼트를 써둔 상태인데, 다른 영화를 먼저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합치거나 나눌 수도 있고요. 조만간 결정을 해야 해요. 궁극적인 계획이랄지 커다란 목표가 있다면,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난 남들과 달라!'가 아니라, 타인과 보편적 기억이나 감수성을 공유하면서도 지극히 개별적인 주체인 '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드러내고 싶다는 의미에서요. 제가 아핏차퐁과 에드워드 양, <아틀란티스>를 만든 마티 디옵을 좋아하는데 이들의 영화에도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은희 얘기는 이미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어갈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은희의, 혹은 영지의 조각조각이 앞으로의 영화에도 묻어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흔히 말하는 정상성의 범주 바깥에 있는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껴요. 싸가지 없다, 기 세다, 독하다고 욕먹는 여자들, 이상하다고 라벨링되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저만의 아름다운 시선으로 보는 것이 제 목표예요.

 

백: 오늘 이야기를 나눠 주신 김보라 감독님께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 소감 여쭙겠습니다.

 

김: 5교시 영화수업 덕분에 처음으로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방문해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게 되었어요. 이야기하는 행위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지만 그렇다고 포장된, 위험부담 없는 얘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마음으로 솔직한 말을 꺼내놓고자 했는데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어요. 더불어 참가자 분들께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덕에 저야말로 공감과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리 / 김송요
사진 / 송기영